체코 원전 '매국 계약' 논란, 숫자로 본 진실과 보이지 않던 기회
한 경제지의 보도로 시작된 정치적 공방, 그 이면에는 40년의 역사와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가 숨어있습니다. 원자력 석학의 분석을 통해 핵심 쟁점을 입체적으로 파헤쳐 봅니다.
최근 '체코 원전 계약이 사실상 매국 행위'라는 한 언론 보도를 시작으로 정치권까지 가세하며 논란이 뜨거워졌습니다. 핵심은 24조원 규모의 사업을 따내기 위해 미국 웨스팅하우스에 과도한 기술사용료와 기자재 구매를 약속한 '불공정 계약'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이는 현실을 무시한 '매국 보도'에 가깝다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논란의 핵심 쟁점들을 데이터와 역사적 맥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쟁점 1. 기술사용료 4,800억, 정말 '퍼주기'일까?
가장 큰 비판은 원전 2기에 대해 총 4,800억원의 기술사용료를 웨스팅하우스에 지불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금액만 보면 상당한 액수이지만, 전체 사업 규모와 비교하면 어떨까요?
전체 사업비 대비 기술사용료 비중
기술사용료 (4,800억원)
총 수주액 (24조원)
기술사용료는 전체 사업비의 단 2% 미만에 해당합니다. 이는 우리 원전 산업의 가격 경쟁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준이 아니며, 이 비용은 발주처인 체코 측으로부터 받아 지급하는 구조이기에 한수원의 직접적인 손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정 교수의 분석입니다.
쟁점 2. 기자재 9,000억, '강매' 당한 것일까?
1기당 9,000억원 어치의 기자재를 웨스팅하우스로부터 구매해야 한다는 조항 역시 '강매'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원전을 짓기 위해 '어차피 사야 할' 필수 부품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정 교수는 "하늘로 날아가는 돈이 아니다"라며, "여러 선택지 중 수십 년간 관계를 맺어온 파트너의 제품을 구매하기로 한 경영적 판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품질과 공급 안정성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계약이 나왔을까? 40년 역사의 타임라인
그렇다면 왜 우리는 독자적으로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고 비용을 지불해야 할까요? 그 답은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복잡한 역사에 있습니다.
한-미 원전 기술 협력의 역사
기술 도입의 시작
체르노빌 사고로 위기에 처한 미국 CE사로부터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기술을 이전받으며 한국 원전 기술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수출의 길을 열다
CE사와 '기술사용계약'을 체결, 미국 외 제3국에 원전을 수출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습니다. (이후 CE는 웨스팅하우스에 인수됨)
예상 못한 변수: '기술 이전'
UAE와 달리 체코가 원전 건설뿐만 아니라 '기술 이전'까지 요구했습니다. 기존 계약에는 이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부의 승인
기술 이전을 포함한 수출을 위해서는 미국 정부의 승인이 필수적이었고, 계약 날짜가 임박한 상황에서 한수원은 웨스팅하우스와의 협상이 불가피한,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였습니다.
"기술사용료 안 주고 단박에 잘하면 당연히 좋죠. 그런데 그건 아이한테 '너 내일부터 전교 1등 해 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외국 기술을 토대로 중간에 진입해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그 과정을 인정해야 합니다." - 정범진 교수
위기는 기회: 역전된 '甲乙' 관계, 새로운 기회가 온다
여기까지 보면 한국이 불리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 글로벌 에너지 시장을 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오히려 이번 계약은 한국 원전 산업에 거대한 기회의 문을 열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기회
미국 내 데이터센터 건설과 리쇼어링 정책으로 폭발적인 전력 수요가 예상되지만, 정작 웨스팅하우스는 원전을 '건설'할 능력이 없습니다.
Westinghouse (미국)
설계는 가능, 하지만 과거 파산 경험으로 '건설(EPC)' 불가
Team Korea (한국)
현대건설: 건설 담당
두산에너빌리티: 핵심 기자재 공급
결론: 웨스팅하우스가 미국이든 유럽이든 원전을 지으려면, 한국 기업과의 협력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습니다.
정치권과 언론은 '한수원'이 체결한 계약의 불리한 조항에만 집중했지만, 그 이면에서는 '한국의 민간기업(현대건설, 두산에너빌리티)'이 웨스팅하우스를 상대로 '甲'의 위치에 서게 되는 시장 구도의 재편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종 결론: 아쉽게 노출된 '회심의 카드'
결국 이번 '매국 계약' 논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본질을 보지 못한 소모적인 논쟁으로 인해 우리가 가진 매우 유리한 협상 카드가 너무 일찍 노출되었다는 점입니다.
미국과의 정상회담 등에서 '미국 내 원전 건설 합작회사(JV) 설립'과 같은 카드를 통해 더 큰 국익을 얻을 수 있었던 기회가 정치적 공방 속에서 힘을 잃었을 수 있다는 것이 정 교수의 우려입니다. 이번 사태는 단기적인 계약 조항을 넘어, 장기적인 국가 전략과 산업의 미래를 내다보는 넓은 시야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