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도, 엔비디아도 아니다
AI 산업의 진짜 주인공은 '전기'다
화려한 AI 기술의 이면에는 '전기 먹는 하마' 데이터센터가 있습니다. AI 시대의 진정한 승자는 연산 능력이 아닌, 전력 확보 능력에서 갈립니다. 서부 개척 시대의 청바지처럼, AI 시대의 금맥이 될 전력 인프라 밸류체인을 심층 분석합니다.
"기술은 미래를 바꾸지만, 인프라 없이는 기술을 현실로 만들 수 없다."
AI 시대의 경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알고리즘의 우수함 만큼이나, 그 알고리즘을 끊임없이 돌릴 수 있는 '전력'을 누가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가 핵심 경쟁력으로 떠올랐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이 2026년에는 2022년의 두 배를 훌쩍 넘어설 것이라 전망합니다. 이는 대한민국 전체 연간 전력 소비량의 두 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입니다.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 전망 (TWh)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AI 선두주자인 빅테크 기업들 너머를 봐야 합니다. 전기를 만들고(발전), 보내고(송전), 나누고(배전), 저장하고(저장), 소비하는(소비) '전력 인프라 밸류체인' 전체가 AI 시대의 숨은 승자이자, 새로운 투자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AI 시대의 혈관, 전력 밸류체인 5단계

전력산업 밸류체인과 전력망 구조. (그래픽=박명규 기자)

전력산업 밸류체인의 강자들. (그래픽=박명규 기자)
① 발전 (Generation)
AI의 심장을 뛰게 할 에너지를 만드는 단계. SMR, 수소 등 차세대 에너지원이 핵심으로 부상합니다.
② 송전 (Transmission)
생산된 전기를 손실 없이 멀리 보내는 '전기의 고속도로'. 노후화된 인프라 교체가 시급한 과제입니다.
③ 배전 (Distribution)
최종 소비처까지 전기를 안전하게 나누는 '전력의 마지막 1마일'. 스마트그리드 기술이 혁신을 이끕니다.
④ 저장 (Storage)
남는 전기를 보관하는 '전력의 냉장고'. 재생에너지의 불안정성을 해결할 게임체인저, ESS가 주목받습니다.
⑤ 소비 (Consumption)
전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경쟁의 최전선. 데이터센터의 냉각 기술과 스마트 관리가 핵심입니다.
① 발전: 작고 똑똑한 원자로, SMR이 온다
AI 시대의 폭발적인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발전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습니다. 탄소 배출 없이 24시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한 '소형모듈원자로(SMR)'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기존 원전의 1/10 크기로 건설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전 세계가 SMR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미국 뉴스케일파워의 소형모듈원전(SMR) 플랜트 가상 조감도. (사진=두산에너빌리티)
글로벌 SMR 시장 규모 전망 (단위: 억 달러)
두산에너빌리티, SK, HD현대 등 국내 기업들도 뉴스케일파워, 테라파워 등 글로벌 선도 기업과 손잡고 SMR 시장 주도권 확보에 나섰습니다. 샘 올트먼 OpenAI CEO가 "에너지 분야의 돌파구 없이는 AI 시대는 없다"고 강조했듯, SMR은 AI 시대를 뒷받침하는 핵심 기술 인프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② 송전: AI 성장의 최대 걸림돌, 낡은 전력망
아무리 많은 전기를 만들어도 보낼 길이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미국 송전선의 70% 이상이 25년 이상 된 노후 설비일 정도로, 낡은 송전 인프라는 AI 산업 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됩니다. 전력 손실이 적고 장거리 송전에 유리한 '고압 직류송전(HVDC)' 기술이 대안으로 떠오르며, 미국과 유럽은 송전망 확충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쏟아붓고 있습니다.
K-전력기기 3사 2분기 누적 수주잔고 현황
이러한 전력망 슈퍼사이클에 힘입어 HD현대일렉트릭,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등 국내 'K-전력기기 빅3'는 사상 초유의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수주 낭보가 잇따르며, 이들의 수주잔고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AI 시대의 혈관을 까는 이들 기업의 성장은 이제 시작입니다.

효성중공업이 스코틀랜드에 공급한 초고압변압기. (사진=효성중공업)
③ 배전: 전력 배달의 최전선, 스마트그리드
송전망을 거친 고압의 전기는 '배전' 단계를 통해 우리가 사용하는 안전한 전압으로 낮춰져 각 가정과 공장으로 전달됩니다. AI 데이터센터처럼 전력 소비가 집중되는 곳에서는 '마지막 1마일' 배전망의 안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제 배전망은 ICT 기술과 결합한 '스마트그리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실시간으로 전력 흐름을 감지하고, 고장을 스스로 복구하며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합니다. LS일렉트릭, 효성중공업 등은 스마트 배전망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고 있으며, 관련 시장은 2030년 1143조원 규모로 성장이 예상됩니다. 스마트 배전망은 국가 전력 인프라의 '신경망'이자 디지털 전환의 핵심입니다.

LS전선의 초고압 직류(HVDC) 케이블은 전력 인프라의 핵심이다. (사진=LS전선)
④ 저장: 전력의 냉장고, ESS가 뜬다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들쭉날쭉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에너지저장장치(ESS)'는 생산된 전기를 배터리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전력의 냉장고' 역할을 합니다. 이를 통해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고 전력망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글로벌 ESS 설치 용량 전망 (GWh)
AI 데이터센터와 전기차 충전소처럼 순간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 곳에서도 ESS는 필수적입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등 K-배터리 기업들은 IRA 세제 혜택을 등에 업고 북미 ESS 시장을 집중 공략하며 중국의 독주에 맞서고 있습니다. ESS는 AI 시대의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게임체인저'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LG에너지솔루션의 ESS 단지. (사진=한국배터리산업협회)
⑤ 소비: 빅테크의 비밀병기, 냉각기술과 AI 관리
AI 경쟁의 최전선은 결국 '소비' 단계에서 벌어집니다.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데이터센터의 효율을 어떻게 극대화하느냐가 관건입니다. 핵심은 '냉각 기술'입니다. AI 연산에 필수적인 GPU는 엄청난 열을 발생시키는데, 기존 공기 냉각 방식으로는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아마존웹서비스(AWS) 데이터센터. (사진=EPA·연합뉴스)
구글, MS, 아마존 등 빅테크들은 서버를 액체에 담가 식히는 '액침 냉각'이나 바닷속에 데이터센터를 짓는 등 혁신적인 냉각 기술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구글은 AI 기반 제어 시스템으로 냉각 전력 소비를 30%나 절감했습니다. 전기를 똑똑하게 쓰는 기술이야말로 AI 시대 빅테크들의 진정한 비밀병기인 셈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해저 데이터센터 '나틱 프로젝트'. (사진=마이크로소프트)